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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앨범] 푸른 돛 - 1986




 필자는 '시인과 촌장'과 같은 시대를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들이 활동하였던 시기보다 약간 늦게 음악을 접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 뮤지션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지 정확히 들어본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나 나이 많은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평범한 포크 락 밴드였다. 꽤 오랜 기간 동안 평범한 포크 밴드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포크라는 이름표 뒤에 가려진


 밥 딜런이라는 뮤지션이 있다. 한국의 대중들에게는 이름만 알려져있고 인지도는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서양 팝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대 뮤지션이다. 밥 딜런은 데뷔 당시엔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다니며 순수 포크만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1965년 5월 포크 페스티벌에 일렉 기타를 들고 등장한다. 사람들은 오물도 던지고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에 비유하며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물론 지금 이런 이유로 밥 딜런을 까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기분이었다. 분명 주위 사람들은 평범한 포크 듀오라길래 나는 트윈 폴리오 같이 포크만 하는 그룹인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접한 시인과 촌장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이 앨범은 포크 앨범이 아니다. 포크를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엄연한 락 앨범으로 분류되어야한다 생각한다. 자유분방하지만 탄탄한 곡 구성, 다양한 사운드, 강렬한 일렉 기타의 솔로, 키보드와 클라리넷 등의 악기들.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포크 앨범이란 말인가. 독창적인 곡 구성과 소리 배치는 프로그레시브 락이나 아트 록을 닮았고, 강렬한 일렉 기타 솔로는 약간 과장해서 지금 당장 락 페스티벌에 세워놓아도 손색이 없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비둘기를 주제로 엮어서 컨셉 앨범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앨범 초반에는 조용히 시작한다. [푸른 돛]까지만 해도 나는 전형적인 포크일 줄 알았다. 가볍게 퉁기는 기타 소리에 부드럽게 얹히는 보컬의 화음들과 시적인 가사, 70년대 음악에서 많이 들을 수 있던 형식의 노래였다.

 그러나 [고양이] 쯤에서부터 앨범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고양이가 내는 그 미묘한 매력을 잘 포착하여 음악으로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마이너와 메이저 음계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기묘한 분위기에서 포근한 분위기로 훌륭하게 넘어간다. 고양이의 울음소리 따라 부르는 보컬의 소리가 기묘함을 한층 더 더해준다. 중간부터 조를 바꾸며 곡 분위기를 완전하게 바꾸어 색다른 느낌도 준다. 곡의 전반부에서는 길가를 걸어가다 만난 낯선 고양이의 모습을 묘사했다면 뒷부분에서는 집에서 보는 고양이를 묘사한 것 같다. 전반부는 고양이의 날카롭고 깊은 눈매가 생각이 나고 후반부에서는 털실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모습이 연상이 된다. 아주 훌륭한 곡이다.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얼음무지개]도 굉장히 훌륭한 곡인데 다른 곡들에 가려진 것 같다. 한 편의 동화를 구연하는 느낌의 곡으로, 무지개를 좋아하던 한 꼬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간에 나오는 바람 소리가 겨울이 왔음을 알리고, 매서운 일렉 기타의 포효가 혹독한 겨울의 모습을 묘사한다. 사실 이 정도의 기타 솔로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처음 들을 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다른 음악을 듣는 건 아닌지 싶었다. 기타 솔로가 끝나고 다시 태연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노래를 부른다. 


 앨범 전반부의 반전 매력이 나오고 [사랑일기]를 듣는데 아름다운 반전에 화가 났다. 이번에는 '시인'과 촌장이라는 그룹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곡을 쓸 수 있을까했다. '수없이 밟고 지나는 길에 / 자라는 민들레 잎사귀에 / 가고 오지 않는 아름다움에 /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 겨울 밤 차 유리창에도' 상처 받고 아파하던 사람들을 꾸준히, 여린 눈빛으로 바라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가사이다. 안도현 시인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에 나오는 함박눈처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포근하게 덮어주고 어루만져주는 그런 노래이다. 


 [떠나가지마 비둘기], [매], [풍경]이 이어진다. 앨범이 진행되며 서정적인 가사를 읊는 보컬 뒤에 가려져있던 슬픔과 괴로움이라는 감정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을 하지만 금새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비둘기 안녕]에서 울음이 폭발하고 만다. [비둘기에게], [떠나지마 비둘기], [비둘기 안녕]으로 이어지는 비둘기 삼부작의 마지막 곡인데,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찢어질 듯이 부르는 부분이 장엄한 마무리를 잘 지어준다. 앨범 커버에도 있고 가사에도 비둘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긍정적인 소재, 희망이나 자유와 같은 의미로 사용이 된다. 그런 비둘기에게 이별을 고하는 노래, 자연스레 울음이 터져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참으로 찬란한 탄식이다.




시 하나에 추억과, 시 하나에 사랑과, 시 하나에 쓸쓸함과...


  한 장의 앨범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시인과 촌장은 몇 줄 되지 않는 가사로 탁월하게 이야기를 잘 풀어내었다. 이 앨범은 짧지만 이 안에 기쁨, 슬픔, 괴로움, 안도감, 자유로의 갈망 등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담겨있다. (시인이라는 칭호를 넘어서 철학자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서정적이고 정형적인 포크라는 틀에서 탈피하여 선구자적인 시도를 한 앨범이라고 볼 수 있겠다. 기존 포크의 서정성은 그대로 답습하여 시적인 가사로 풀어내는 반면 전형적이지 않는 곡 구성과 기존 포크에선 찾아볼 수 없던 사운드의 추구를 통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놓았다. 어찌 보면 컨셉 앨범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앨범 구성을 하면서 [푸른 돛]에서 [비둘기 안녕]까지 이어지는 부드럽지만 탄탄한 진행은 기존의 가요에서 쉽게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앨범이리라.


 이 앨범을 듣고 시인과 촌장의 다른 앨범들을 몇 개 들어보았다. 역시나. 기회가 된다면 그 앨범들도 리뷰해볼 생각이다. 모두 리뷰하고 다른 지인들에게 추천해줄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앨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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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imagination, you're waiting, lying on your side with your hand between your thighs and a sm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