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다른 앨범을 리뷰할 계획이었으나,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얼른 글을 쓴다. 지금 이 감정을 잊고싶지가 않다. 금방 쓰는 것이다보니 내용이 엉망진창이겠지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1
[위험! 접근 금지]
이 앨범은 매우 강렬하다. 선명하게 남는 인상을 준다. 앨범 커버부터가 그렇다. 붉은 색과 초록 색이 만들어내는 색채 대비, 깊게 찌푸려진 미간, 피로 물든 것처럼 보이는 이까지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커버를 장식하고 있다. 마치 이 앨범은 '노약자가 듣기엔 주의가 필요합니다'며 경고를 주는 것 같다. 붉게 타오르는 분노, 날카로운 칼과 같은 감정을 앨범 커버에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앨범 커버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1번 트랙 [차]부터 아주, 분노로 똘똘 뭉쳐져있다.
전반저긴 앨범은 날카로운 금속의 색을 낸다. [낮]의 비브라토에는 자칫하면 손가락이 베일 것만 같다. 또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식은 쇠]나 [차]라는 제목을 비롯해 앨범 군데군데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을 사용했다. 사운드 또한 1집에 비해 전체적으로 거칠어졌다. 보컬의 목소리도 그의 수염만큼이나 까끌까끌하고 기타의 톤도 1집의 잘 빠지는 청량한 소리라기보단 거슬거슬하게 들린다.
앨범의 시작인 [차]는 이 앨범이 전반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전반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는 곡이라 볼 수 있겠다. 질주하는 기타 소리와 보컬의 거친 폭풍이 곡을 쉴 새 없이 어디론가 몰고간다. 무언가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한 것 같이 곡이 달려나간다. 라이브 공원을 그대로 녹음한 것처럼 가공되지 않은 맛이 있는 노래이다. 템포도 빠르고 길이도 2분 40초 가량이라 굉장히 짧게 느껴지는 곡이다. 네이버 뮤직에 19금 딱지를 걸어놨는데 가사에 욕설이 한 번 등장해서 그런 것 같다.
[차]로 겨우 분노가 식었나, 다음 트랙은 [식은 쇠]이다. 사실 이름만 식은 쇠이지 내가 보기엔 아직도 뜨겁다. [차]보다는 조금 얌전해졌지만 여전히 화가 잔뜩 나있다. 식은 쇠가 망치였는지 듣는 동안 내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치는 기분이었다. 굉장히 독특한 기타 리프가 등장하고 드럼, 베이스가 들어가며 곡이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가볍지만, 그 가벼움 안에 뼈가 있다. 안정적인 베이스와 드럼 소리 위에서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보컬의 매력적인 음색이 매력있고, 서로 다른 스타일 두 개의 기타 솔로를 동시에 들려주는 기타 솔로 부분이 아주 멋지다. 후렴구 들어가기 전 부분이 참 재미있다. 간단하고 리듬감이 강조된 곡이다.
[장사]는 가사가 아주 예쁘다. 이 앨범에서 운율과 아름다움이 가장 잘 살아있는 가사라고 생각한다. '도시들은 앞을 보고 / 우리들은 너를 보고 / 내 식구는 나를 보고 / 엉엉엉 우네'라든지 '장사는 망해간다 / 내가 팔이요 / 발이요 다리요 / 버둥대는 밤이요'라든지, 예쁘게 잘 쓰인 가사를 예쁘게 잘도 부른다. 역시나 다른 곡처럼 독특한 기타 리프가 인상적이고, 쉴새 없이 달려가며 치는 드럼이 특히 마음에 든다. 심벌이 부서지고 스네어가 뚫어져라 쳐댄다.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이뤄진 곡이다.
[낮]은 앨범 발매 이전에 뮤직비디오가 먼저 공개되어서 알고 있었다. 구소련의 노동자를 연상시키는 곡괭이질과 세계대전 즈음 미국의 촌스러운 디자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뮤지비디오였다. 모든 악기들이 제멋대로 날뛴다. 기타는 고음에서 비브라토를 하며 날뛰고 베이스는 저음에서 저탁류마냥 싹 쓸고 지나가고 드럼은 몸이 절로 움직이는 비트를 담아낸다. 밴드로서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는 곡이라 생각한다. 앨범 발매 이전에 공개한다는 것인 뮤지션이 이 앨범을 대표하는 곡이라 생각한다는 뜻이렸다. 앞으로 이런 음악을 할 것이라 팬들에게 예고라도 하는 것일까? 아주 마음에 든다.
다음은 내가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88]이다. 앨범 거의 절반을 쉴 새 없이 달려가더니 갑자기 딱 멈춘다. 그러곤 나의 마음에 푹푹 들어와 박힌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인지, 달려가다가 급정지를 하니 관성 떄문에 몸이 앞으로 쏠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 이유 없이 20번은 돌려서 들은 것 같다. 사랑스럽다. '바람은 조금씩 느려지고 / 헤매고 알아들을 수 없네 / 길은 가로로 이어지고 / 나는 그때 혼자 앉아 있었네' 한(恨)이 느껴지는 보컬이었다.
이어서 [묽은 밤 (Second Mix)]와 [이빨과 땀 (Second Mix)]이 이어진다. '굴절률' 앨범 발매 이전에 냈던 '추월차로' EP에서 먼저 선보였던 곡들이다. [88]의 여운이 남아있는 느낌으로 잔잔히, 그러나 흥겹게 흘러간다. 예전 앨범에 있던 곡을 재녹음한 것이라 그런지, 다른 곡들 사이에서 이질감이 가장 큰 두 곡이다.
아까 나왔던 [88]이 좀 더 50년대 로큰롤스러워진 [88 (Ver. 2)]이다. 곡을 듣는 내내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을 정도로 기타와 드럼이 아주 흥겹다. 아주아주 흥겹다. 중요해서 두 번 강조했다. 제목은 [88 (Ver. 2)]이지만 가사만 빼면 [88]과의 연관성이 별로 없어보이는 곡이다. 사실상 다른 곡이라 봐도 될 것 같다. 두 곡 다 마음에 쏙 들고, 둘 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느낌으로 앨범에 들어갔다.
[88]과 마찬가지로 쉬어가는 느낌의 [굴절률]이다. 앞의 곡들과는 다르게 금속적인 색도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고, 드럼은 전혀 나오지 않으며, 베이스는 근음 정도만 치는 느낌으로 친다. 느릿느릿한 이스턴사이드킥만의 발라드이다. 가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루 바쁜 일과를 끝내고 집에 들어갈 때 들으면 적당한 노래이다. 중간에 '많은 것은 사실보다 / 조금 다르게 / 들리는군'이라는 부분과 '많은 것은 생각보다 / 조금 다르게 / 흘러가네'라는 가사가 등장한다. 아마 이 곡의 제목이자 앨범의 제목인 '굴절률'을 암시하는 가사라고 생각한다.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이 나한테는 굴절되어서 조금 다르게 들리고 생각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전형적인 인지주의식 해석이다 ㅎㅎ.
비슷한 분위기의 [당진]으로 앨범이 끝이 난다. 당진 앞바다에서 혼자 술 마시는 모습이 연상된다. 가벼이 철썩이는 기타 소리는 파도를 연상시키고 중간의 고음부는 갈매기 울음 소리를 생각나게 한다. 드럼이 중간에 들어가 분위기가 잠시 고조되다가, 점차 페이드 아웃 되며 앨범은 막을 내린다.
반복의 미학, 그리고 이것저것
만일 내게 음악의 본질이 무엇이뇨 묻는다면 '반복성'이라고 답하고싶다. 아무리 시끄러운 소음이라도 반복이 되면 그 안에서 인간은 리듬을 발견하고 음악성을 느낀다. 이러한 음악의 본질을 아주 잘 활용한 앨범이라 생각한다. (이 앨범의 소리가 소음 같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예시로 든 것 뿐이다) 독특한 리듬과 독특한 리프를 계속 반복시킴으로서 그 아름다움을 이끌어냈다. 앤디 워홀의 캠벨 스프 통조림 그림과 같은 맛이다.
전반적인 앨범은 날카로운 금속의 색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의 다른 색이 나온다. 앨범의 전반부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달려나가는 정열적이고 열정적인, 잔뜩 달궈진 뜨거운 금속의 색이라면 후반부는 굉장히 잘 닦이고 가공되어 깔끔하고 맨질맨질하며 부드러워보이기까지 하는 금속의 색이다.
앨범의 배치를 이렇게 해놓으니 용두사미 같이 보이기도 한다. 앞 부분의 4 곡 [차] - [식은 쇠] - [장사] - [낮]으로 이어지는 이 앨범의 전반부는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로 이어지는 명군 라인에 빗댈 수 있겠다. 후반부도 정말 만족스러운 곡들인데 다만 분위기가 부드러워서 강렬한 인상은 들지 않는다. 아무튼 서로 다른 두 가지 색이 알맞게 배치되어 분위기나 감정의 대비를 시키는데, 정말 보기 좋은 조화를 이뤄낸다.
이스턴사이드킥의 곡들은 정말 한국적이다. [무지개를 위한 싸움]과 같은 곡에서 특히나 잘 느껴진다. 가사도 외래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장기하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곡의 분위기 자체가 한국적이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아무튼 그렇다.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뛰어난 1집을 보여준 뮤지션들이 2집을 1집보다 훨씬 못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1집을 잘 만들어버린 순간, 넘어야할 엄청난 산을 스스로 세운 셈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스턴사이드킥은 이를 훌륭하게 해결해나간 것 같다. 1집에 비해 탁월하게 좋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앞으로 더욱 발전해나갈 모습이 기대가 된다.
정말 사랑스러운 앨범이 아닐 수가 없다. 고민하지 않고 바로 CD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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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what's the big idea?
(원글 2015년 11월 04일 작성)
- 원글은 2015년 11월 4일 작성되었고 이 앨범은 2015년 10월 29일 발매되었다. 발매되고 이 앨범 듣자마자 쓴 글이다. 주석은 물론 지금 다는 것이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