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오랜만에 다 죽어가던 블로그에 들어왔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아예 안 들어오지는 않는 것을 보고 꽤나 놀랐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글쓰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내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지만, 그 날까지 최대한 많은 글을 써보고 싶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건 아무래도 음악 듣는 것 같다. 하지만 듣기만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어폰을 통해 나온 소리는 이내 곧 없어져버린다. 이것은 그 음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음악을 영구히 남기고 싶은 생각에 이런 리뷰를 시작한다. 한 글자라도 남겨주는 것이 뮤지션들과 음악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다.
앨범 리뷰를 이런 이유로 남기게 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앨범 리뷰를 시작하고자 한다.
처음인만큼 내게 의미가 있는 앨범으로 시작하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역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의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적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리뷰할 앨범은 영국의 록밴드 [비틀즈]의 [The BEATLES], A.K.A. The White Album이다.
다양성의 앨범
미니멀리즘을 앨범 커버로 표현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림과 같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다 제거해버리고 앨범 제목이자 뮤지션 이름 하나만 딸랑, 그것도 잉크로 쓴 것도 아니라 엠보싱 처리만 해서 놓았다. 몇몇 LP판들을 제외하고는 저 일련번호조차 나와있지 않다. 정말로 간결하고, 최소한의 것만 담은 환상적인 앨범 커버이다.
하지만 이 앨범에 담긴 내용물은 이와 정반대이다. 이 앨범의 정체성을 정의해보자면 다양성이라고 감히 정의해볼 수 있겠다. 수록곡들은 다들 개성 넘치고 제각각의 다양한 매력을 뽐낸다.
작곡가, 보컬, 악기, 장르, 가사 등 모든 방면에서 이 앨범은 통일성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이는 비틀즈가 이전까지 해왔던 것들과 사뭇 다르다. 감정적인 면의 통일감을 줬던 [Rubber Soul]부터 형식적인 면의 통일감을 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앨범 내의 통일성'이라는 기준을 세운 것처럼 음악을 해왔었다. 그러나 이 앨범에 이르러, 그들은 스스로 이를 파괴해버렸다. 결과물은 컴필레이션 앨범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제각각이며 따로 노는 더블 앨범이 되었다.
어떻게 다른지 간단하게만 살펴보자.
작곡가는 이전까지의 앨범과 전혀 다르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세력 싸움이던 이전까지의 앨범과는 달리, 조지 해리슨이 자신의 영역을 제법 확장하였고, 드럼 치느라 바쁘던 링고 스타도 새로운 곡을 써냈다. 덕분에 멤버 4명이 모두 곡을 써서 낸 최초의 비틀즈 앨범이 되었다. 이런 앨범은 [The BEATLES]와 [Abbey Road] 밖에 없다. 1
보컬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Back In The U.S.S.R]에서 파워풀한 보컬을 보여준 폴 매카트니는 [I Will]에서 달콤한 서정적인 목소리를 보여줬다. [Julia]에서 감미로운 목소리를 내던 존 레논은 [Yer Blues]에서 락스타가 된다. 조지 해리슨도 4곡이나 보컬로 참여했고 링고 스타도 두 곡이나 참여했다. 서브 보컬로 요코 오노도 등장한다.
곡의 구성이나 가사도 굉장히 범위가 넓다. [Helter Skelter]과 같은 하드락 곡이 있는가 하면 [Honey Pie]처럼 1920년대가 연상되는 재즈풍의 곡도 있다. [Piggies]와 같이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곡이 있는가 하면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처럼 아무 생각 없이 불러도 되는 곡도 있다. [Wild Honey Pie]처럼 단순한 구조의 짧은 곡도 있는가 하면 [Happiness Is A Warm Gun]과 같이 여러 멜로디를 이어 불러 여러 곡을 듣는 것 같은 대곡적 구성을 취한 곡들도 보인다.
일반적인 앨범들처럼 하나의 주제를 담고있지도 않고, 곡들 간의 연관성도 떨어지며, 앨범 전체로 봤을 때에도 기승전결이라는 흐름을 감지하기가 어렵다. 과연 한 밴드가 만든 앨범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때문에 나는 이 앨범을 다양성의 앨범이라 부른다. 비유를 하자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이 말한 '초콜릿 상자'와 같은 앨범이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길이 없다.
나는 이 앨범에 대해 긍정적인 평을 내리고 싶다. 유기성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앨범은 비틀즈라는 괴물 밴드의 개개인 개성과 천재성이 탁월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자신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실험성과 연주력을 보여준 앨범으로, 이는 조지 해리슨이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 이 앨범이라는 것을 근거로 들 수 있겠다. 불화를 겪던 멤버들이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스스로 발견하고 음악적으로 표현하며 불화를 예술로서 표현하게 된 앨범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앨범을 만들게 된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곡 수가 굉장히 많아 전부 다 쓰지는 못하겠고, 몇몇 곡들만 간단하게 써보겠다. 리뷰하지 못한 곡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보낸다.
비행기가 출발하는 소리와 함께 플레이리스트도 출발을 한다. 첫째 곡인 [Back In The U.S.S.R.]은 비행기 연착음을 자연스럽게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을 시켜 정말로 소련으로 여행을 떠나는 느낌을 준다. [The Beach Boys]를 연상시키는 코러스가 여행하는 듯한 분위기를 한껏 더 띄워준다.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곡과 질러대는 폴 매카트니의 보컬이 전형적인 락 음악이다.
[Ob-La-Di, Ob-La-Da]와 [I Will]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 100선 등을 꼽으면 항상 등장하는 노래이자, 대중에게 인지도가 아주 높은 비틀즈의 노래들일 것이다. 멜로디가 아름다워 기억에 오래 남고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다. [Ob-La-Di, Ob-La-Da]는 스카 리듬을 차용한데다가 징글쟁글 거리는 효과음들이 몸을 들썩이게 만들고 [I Will]은 입으로 베이스 소리를 내어 쫀득쫀득하게 들린다.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이 기타 연주는 환상적이다. 가만히 듣다 보면 제목처럼 보컬 소리를 따라가며 기타가 우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에릭 클랩튼의 연주이다. 기타 솔로가 아주 긴데 전혀 지루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Happiness Is A Warm Gun]은 곡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파격적이다. 노래의 메인 멜로디가 바뀜에 따라 곡의 분위기도 바뀌고, 심지어 박자도 바뀐다. 엄숙한 분위기로 시작하다 기묘한 분위기로 바뀌고 긴장이 지속되다가 마지막에 긴장이 해소되며 빵 터지는 느낌을 준다. 이때 존 레논의 절규하는 듯한 존 레논의 보컬이 입혀지니 노래가 끝날 즈음에는 소름이 돋는다.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로 시작되는 [Martha My Dear]과 서부의 총잡이가 바에서 읊조리듯 부르는 [Rocky Raccoon]도 빼놓을 수 없다.
[Birthday]와 [Everybody's Got Something To Hide Except For Me And My Monkey]는 탄산음료 같은 곡이다. 날카로운 기타 리프와 파워풀한 드럼이 그루브를 만들어가며 존과 폴의 락 보컬이 빛을 발한다. [Birthday]는 특이하게도 폴 매카트니가 드럼을 쳤는데, 그 때문인지 다른 곡들과는 다르게 투박한 느낌이 든다. [Every...]는 가벼운 톤의 기타가 날쌘 느낌을 준다.
[Long, Long, Long]은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곡이다. 조지 해리슨이 자신의 종교적인 가치관을 노래로 표현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공포스럽게 들리기도하지만 듣다보면 묘하게 안정감이 드는 목소리이다. 이런 목소리는 존 레논이나 폴 매카트니가 만들지 못하는 목소리이다. 오로지 조지 해리슨만이 가능했던 그만이 목소리이다.
[Piggies]와 [Revolution 1]에는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잘 녹여냈다. [Revolver] 앨범에의 [Taxman]과 'Bed-In Peace' 운동의 연장선상처럼 보인다.
[Wild Honey Pie]와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는 짧고 굵다. 강렬하고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를 않는다. 노래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애매한 위치에 있지만 중독성이 강해 자꾸 듣게 된다. [Helter Skelter] 부른 사람과 같은 사람이 불렀는지 의심이 간다. (사실 비틀즈가 아니라 다른 뮤지션이 이런 노래를 냈지만 욕을 잔뜩 먹었을 것만 같다.)
[Blackbird]와 [Julia]의 기타 연주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가사는 둘 다 추모성이지만) 마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누가 더 아름다운 어쿠스틱 곡을 쓰는지에 대해 경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Blackbird]의 기타 연주는 절제된 사운드 안에서 최대한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Julia]에서 존 레논은 담담하지만 자칫하면 울어버릴 것만 같은 서글픔을 담아낸다.
[Yer Blues]에서는 존 레논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Julia]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면 여기서는 부모님에 대한 불만이 드러난다. 'Blues'라는 이름에 맞게 찐득거리는 느낌이 나지만 불만이 담긴 곡이라 그런지 굉장히 공격적인 사운드가 난다.
존 레논에게 질 수 없다는 듯. 폴 매카트니는 [Helter Skelter]을 내놓았다. 간단하지만 강력한 드럼, 이펙터를 잔뜩 걸은 기타 사운드가 꼭 헤비메탈을 연상시킨다. 폴 매카트니의 보컬도 끝내준다. 가성과 진성을 넘나들며 부르는 것이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잘 부른다. 말로 표현이 잘 안된다. 폴 매카트니 보컬의 끝판왕급 노래이다. 링고 스타가 손에 물집 잡히면서까지 쳤다는 곡이니 꼭 한번 들어보시라.
[Revolution 9]은 여러모로 특이한 곡이다. 요코 오노의 아방가르드 영향을 받아 곡도 참 독창적이다. 좋게 말해서 독창적이지, 처음 듣는 사람은 기겁을 해도 이상하지가 않다. 원래는 [Revolution 1]과 자연스레 이어지던 곡이다. [Revolution] - Take 20을 들어보면 알 것이다. 존 레논이 무슨 생각으로 이를 두 곡으로 나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Take 20을 그대로 내놨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전위적인 느낌과 대중적인 느낌을 존 레논이 어떻게 섞으려 했는지를 알면 여러분들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소름이 돋는 [Revolution 9] 뒤에 [Good Night]를 배치하는 센스까지 잊지 않았다.
짧은 마무리
나는 이 앨범을 매우 강력하게 추천한다. 만약 당신이 자칭 락 애호가라면 (아마 이미 들어봤을 가능성이 크지만) 한번 쯤은 제대로 들어볼 필요가 있다. 아니, 적어도 세 번은 들어봐야 한다 생각한다. 5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앨범이라 현대의 사운드에 익숙하다면 촌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안의 시대정신을 느끼면서 들어보자. 비틀즈가 왜 비틀즈인지, 이름 값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될 것이다.
끝으로,
하나하나 풀어보면 닮은 점이 하나도 없고 기승전결도 불완전한 엉터리 앨범처럼 보인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들어보며 진행하면 그 안에서 은은하게 통일성과 기승전결이 배어나온다. 배채법과 같은 느낌이 묻어나온다. 이때 느낄 수 있는 이런 은은한 연관성이 비틀즈라는 밴드 자체가 만들어낸 그들만의 사운드이리라 생각한다.
마침 스피커에서 [Good Night]이 나오고 있다. 잘 시간이 돌아왔다.
Coming Up Next....
이게 무슨 냄새야?
(원글 2015년 9월 26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