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
내가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딱 느꼈던 기분이다. 동시에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반을 만든 그룹의 이름이기도 하다.
요즈음 이적 씨와 김진표 씨 둘 다 방송에 자주 등장하며 종종 어수룩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만, 그들의 음악적 재능과 음악 세계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뮤지션들이라 생각한다.
Intro : Panic Is Coming!
참으로 기괴한 앨범 커버이다. 오늘 밤에 악몽이라도 꾸면 볼 법한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있다. 앞면만 이런 것도 아니고 뒷면은 물론, 가사가 써있는 속지까지도 이런 그림들로 가득하다. 자연스레 이 앨범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피를 흘리는 사람들, 침을 흘리는 강아지(?), 기괴한 모습의 생물들...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마지막 즈음에 자연스레 제목에 눈이 가게 된다.
Panic - '밑'
밑이라 함은 무엇인가? 밑은 바닥이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밑은 무언가의 바닥인가? (본인들에게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감히 추측해보자면 여기서의 미은 이 사회의 바닥을 의미한다 생각한다. 사회의 긍정적인 부분이 아닌 부정적인 부분, 사람의 얼굴은 자주 보지만 발은 자주 보지 못하듯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그런 부분들을 밑이라고 규정한 것 같다.
이 앨범은 그런 밑바닥의 실태를 낱낱이 까발리고 있다.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 언론에 대한 비판, 교육계에 대한 비판, 심지어는 부모님에 대한 비판까지, 잘 보이지 않아서 무언가 썩고 있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 그런 부분들을 까발리고 있다. 가사들의 수위도 제법 있어서 한번 들으면 잘 잊혀지지 않는다. 밑바닥의 끝까지 싹싹 긁어서 담아낸 맛이다. 꿈에서도 나올 법한 강렬함이다.
하나의 예술작품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이 앨범은 Intro와 Insert, Outro의 구조를 착실하게 따르고 있다. [냄새(Intro)]에서 시작하여 [어릿광대(Insert)], [사진(Outro)]까지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곡들이 이어진다. 한번 듣기 시작하면 어디 중간에서 끊기 애매해진다. 하지만, 이 덕분에 하나하나 들을 때보다 전체를 들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맛을 느끼기 쉬워졌다. 강물에 요트 하나를 띄워놓고 거기 누워있는 것마냥 몸을 맡겨보면 자연스레 앨범이 끝으로 인도한다. 전체는 부분의 총합보다 큰 법이다.
어떤 면에서 봤을 떈 상당히 시대를 잘 탄 앨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90년대 이후 가사검열이 사라지며 수많은 음악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디밴드 1세대인 언니네 이발관의 1집이 이때 나왔고 조선 펑크가 [Our Nation]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대중드레게 익숙한 자우림이나 델리 스파이스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한국 음악이 본격적으로 다양화되던 시기에 적절하게 등장했다. 만약 이 앨범이 지금 나왔다던지 80년대 나왔더라면 오래오래 기억되는 앨범이 될 수 있었을까. 반대로 그런 시기였기에 이런 앨범이 허용될 수 있었을려나. 둘 다일 수도 있고. 물론 그렇다해서 이 앨범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말이 잠깐 옆으로 샜다.
인트로부터 이 앨범은 다른 앨범들과의 차별성을 보여준다. 거센 콧소리와 부글대는 사운드, 공포스러운 음계에 이적 씨가 만드는 기묘한 소리들. 여기에 김진표 씨의 짙고 낮은 목소리가 깔리니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가사도 굉장히 시적이며 자극적이다.
'뭔가 썩고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세상 밑에 춤추는 이 냄새가 우릴 병들게 해.'
Intro라는 중요한 자리에 이런 노래를 배치한 이유가 뭘까? 이 노래가 사실상 이 앨범의 핵심 요약본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길이와 낮은 인지도에 비해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곡이다.
다음 곡은 분위기를 바꿔서 굉장히 신나는 곡이다. UFO를 공포의 대상이 아닌 동경의 대상으로 두고 쓴 곡이라 한다. UFO가 날아와서 '살찐 돼지들'과 '거짓 놀음'들을 거꾸러트리고, 눈물 흘리게 만들고, 밧주로 목을 엮는단다. 굳이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할까, 무엇을 의도하려 했는지는 뻔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악기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다 마지막에 이적의 목소리만 남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소름끼친다. 다양한 사운드들이 자기 자리를 맞춰 알맞게 잘 들어가서 듣기 굉장히 좋다.
[혀]! 도입부부터 굉장히 섹시한 베이스 소리가 우릴 인도한다. 'Get Funky'라는 목소리에 맞춰 펑키한 리듬감이 온몸을 감싼다. 이 위에 그려지는 이 노래는 정말로 아름답다. 섹시하다는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 곡이다. 가사도 굉장히 멋지다. '미끄럽게 내게 부끄럽게 내게 부드럽게 다가와 / 속삭거리다'라는 가사는 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가사이다. 뒤에 나즈막히 들리는 폭발적인 여성 보컬의 목소리는 마치 Pink Floyd이 앨범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수록곡, [Great Gig In The Sky]를 연상시킨다.
다음은 수려한 기타 선율이 일품인 [강]이다. 이적 본인께서 대낮에 소주 몇 병을 까가며 울면서 작곡한 곡이라 하는데, 과연 그렇게까지 하며 만들 가치가 있는 곡이다. 어느 노을이 지는 강에서 노젓는 뱃사공이 생각나는 노래이다. 술 마시고 기분 우울할 때, 혼자 틀어놓고 울기 적당한 곡이다. 중간의 실로폰 소리와 코러스 보컬이 곡을 심심하지 않게, 최소한으로만 곡의 분위기를 띄워준다. 아주 적절하다.
[어릿광대(Insert)]와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는 자주 듣기엔 조금 거북하지만, 가끔 들을 때 아주 좋은 곡이다. 곡이 길고 템포가 느린데다 곡의 구성이 반복적이어서 연속적으로 여러번 듣기는 거북하다. 그러나 가끔 들으면 이만한 별미가 없다. 도입부의 현악 소리와 김진표 씨의 나레이션, 그리고 절박한 것 같이 들리는 이적 씨의 보컬과 함께 들리는 꽹과리 소리가 참으로 자극적이고 톡 쏘는 곡이다. 드럼 소리가 굉장히 찰지다.
[벌레]만하게 학교 교육을 직설적으로 깐 곡이 얼마나 있었을까.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는 저리가라할 정도이다. 일단 대놓고 교사를 '벌레'에 비유했다. 가사도 '엿이나 처먹으라지', '한 대 확 쳐버리고 싶지'와 같은 식의 강도 높은 디스이다. (요즘 노래와 비교하는 것은 아니다)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 후렴구 소리와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것 같은 이적 씨의 목소리가 눈에 띈다. 이 앨범의 다른 곡들에 비해서 김진표 씨의 비중이 꽤나 큰 노래인데, 그래서 그런지 다른 곡들보다 깊게 푹푹 파고드는 것이 많은 편이다. 요즘 나오는 랩에 비하면 상당히 초라해보이는 랩이지만, 가사 전달력도 뛰어나고 그루브도 굉장히 잘 살리는 아주 멋진 랩이다. 특히 가사가 많이 공감이 간다.
[불면증]도 굉장한 곡이다. 삐삐 밴드의 보컬 이윤정 씨의 목소리가 이적 씨와 같이 나오며 예상치 못했던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12분이나 되는 긴 길이지만, 마치 변주곡을 연주하듯 기본 멜로디를 두고 자기들끼리 이리저리 노래를 바꿔가며 부르니 지루할 틈이 없다. 모리스 라벨의 [Bolero]나 비틀즈 [Hey Jude]의 후렴구가 생각난다. 도입부는 정상적으로(?) 부르다가 갈수록 정신줄을 놓으며 부르는데, 잠을 못 자는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짜증을 내고 예민해지는 것이 연상이 된다. (솔직히 [강]보다 이쪽이 더 소주 몇 병 까고 부른 것 같다.)
다음 곡도 김진표 씨의 역작이다. [Mama]. 중고등학생 시절에 쓴 가사라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잘 쓴 가사인데다가 자기 부모도 거침 없이 까대는 깡, 말이 나온다. [혀]도 그렇고 [벌레]도 그렇고, 김진표 씨의 낮은 목소리가 베이스 소리와 굉장히 잘 어울린다.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달리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덜 괴기스러운 곡 하나를, 그것도 짧은 것 하나를 내놓고 앨범은 허무하게 끝이 난다.
짧은 Outro
보통 이런 기괴한 분위기의 앨범들은 한 번 들으면 잘 듣지 않는다만, 이 앨범은 다른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생명력을 가진 앨범이다. 이런 음악성적인 측면 외에도, 발매 당시 사회의 곪고 썩어가던 부분을 낱낱이 드러냈다는 역사적인 의의도 있는 앨범이다.
이후로 더 좋은 앨범들을 꾸준히 찍어냈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적 씨와 김진표 씨는 앨범 두 장을 더 내고 솔로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이적 씨와 김진표 씨의 솔로 활동도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뤄볼 예정이다.) 둘 다 패닉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음악을 했는데, 아마 이 앨범이 밑거름이 되어주지 않았나 싶다.
패닉은 1집과 2집을 내며 짧은 기간 동안 정말 굵은 활동을 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이 앨범들의 생명력은 오래 갈 것이다. 미래에도 꾸준히 듣는 앨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Coming Up Next....
비온다... 모두 입을 벌려..
(원글 2015년 9월 28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