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음악을 듣는 폭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허구언날 60년대 서양 락 음악만 듣다가 든 생각이다. 이에 새로운 음악가를, 가능하면 우리나라, 다른 장르, 다른 시대의 뮤지션을 찾고 싶었다. 그러다가 알게된 것이 선우정아이다.
처음 그녀의 노래를 들었을 때, 왜 지금까지 이런 사람을 모르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정아 씨는 정말 강력한 보컬이다. 이렇게 인상적인 보컬은 웅산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이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뮤지션을 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작년에 한국대중음악상을 2관왕이나 탄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1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음악에 빠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리뷰를 시작한다.
미칠 듯한 보컬의 향연
영화 '왕의 남자' 중 백미인 씬을 고르라면 마지막 광대놀음을 꼽고 싶다. 부채 하나에 의존해 외줄 위를 위태롭게 걷는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으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마지막에 쓰러지는 듯하다가 제자리에서 갑자기 점프를 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이런 외줄타기를 보는 관객들은 광대의 몸짓에 반응하며 스릴을 느낀다. 떨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지지 않는 것이 줄타기의 묘미이다.
선우정아 씨의 노래는 이런 줄타기와 같다. 변박을 주고 당김음을 넣고 꾸밈음을 넣으며, 음계며 박자며 마음대로 가지고 논다. 외줄타기와 같이 아슬아슬한 매력이 넘친다.
[주인공의 노래]는 사실 앨범을 접하기 전에 유튜브에서 먼저 만났었다. 선우정아 씨가 각종 악기를 연주하며 (아마 기타와 키보드 외에는 연주하는 척 같지만)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정말 재밌어보였다. 웃으며 자신감 있게 노래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가사처럼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뮤비 같았다. 가사는 길어 여기에는 적지 않는다만 가사도 주인공다운 가사를 붙였다. 궁금하면 한번 직접 찾아보기를 바란다. 여튼 덕분에 이 앨범을 알게 되었으니 내게는 정말 고마운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뱁새]에서는 황새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는 뱁새가 연상된다. 옷이라는 깃털과 날개를 아무리 달아도 황새처럼 날 수 없는, 뱁새 같은 화자의 설움이 잘 전달된다. 이는 실로 마술 같은 일이다. 선우정아 씨는 노래를 그림 그리듯이 부른다. 분명 노래를 부르는 것 뿐인데, 머리 속에 그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다른 노래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상황에 알맞게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낸다. 대단한 능력이다.
다음 곡 [당신을 파괴하는 순간]에서는 분위기가 약간 꺾여 조용하게 시작한다. 곡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곡은 강렬해진다. 피아노 소리가 힘차지고, 드럼 소리가 추가되고, 브라스가 강해진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목 놓아' 부른다. 한 편의 서사시의 대단원을 보는 것 같다. 음원보다는 라이브 버전이 더 좋다.
[Purple Daddy]는 다른 곡들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독특한 곡이다. 일렉트로닉한 사운드가 많이 섞인 곡인데, 재즈와 소울의 중간 즈음에 있는 줄 알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새로운 분위기에 잘 적응했다. 곡의 템포도 빠르고 스네어 드럼 소리도 조곤조곤하게 잘 들어가서 가사를 모르고 듣는다면 마냥 신나게만 들리겠지만, 가사를 생각하며 다시 듣는다면 굉장히 애닲은 절규가 들릴 것이다. '보라색 아빠가 내 앞에 서있네'라든지 '아빠를 돌려줘'라든지, 약간 무섭기까지 하다. 사실 약간 놀란 것이, '보라색 아빠'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가사의 발상 자체가 상상 밖의 것이었다. 꽤나 마음에 드는 곡이다.
[울지마]는 [당신을 파괴하는 순간]과 비슷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앞의 [Purple Daddy]에서 온 힘을 다해서 울어서 그런지 힘이 빠진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초반부에서는 금방이라도 모든 걸 포기해버릴 것만 같이 부른다. 그러나 '니가 뭘 안다고, 아니 가란 말은 아니야' 부분을 기점으로 곡이 밝은 분위기로 바뀐다. 실컷 울어버리고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한번 울컥하기는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기쁨을 찾아 희망을 찾아가자고 말한다. 울고 싶을 때 들으면 참으로 힘이 될 것 같은 노래이다.
[알 수 없는 작곡가]는, 선우정아 씨의 자전적인 노래이다. '난해하다, 자극 없다, 안 섹시하다'는 대중의 소리에 대해 '억울하다, 편견이다, 이해는 한다(ㅋㅋㅋ)'고 당당하게 대답을 한다. 변박을 계속 노래하며, 무명을 떨치지만 'Music is my life'라고 말한다. 1번 트랙인 [주인공의 노래]처럼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런 모습에 선우정아 씨의 보컬이 들어가니 제대로 된 곡이 하나 나오게 되었다.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변박을 주고 꾸밈음을 넣고 음계와 다양한 보컬 스타일을 넘나든다. '고음병'에 걸린 사람에게 노래를 잘 부른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해줄만한 노래이다.
다음은 재밌는 가사와 불협화음을 내는 피아노 소리가 마음에 드는 [Workaholic]이다. 왈츠 풍으로 연주되는데 미묘한 불협화음이 들려 아주 독창적인 색을 띤다. 배경으로 나지막히 그녀의 콩트(?) 소리도 들려 웃음도 절로 나온다. 청자를 들었다 내려놓았다 하는 특유의 보컬은 여전하고, 가사도 센스가 넘친다. 인맥의 바다를 헤엄치는 인어공주가 말보로에게 목소리를 팔았다는 표현은 도대체 평소에 뭘 하길래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코러스도 아주 재치넘친다. More work, more money, more tobacco, more drinks!
[You Are So Beautiful]은 원래 조 코커(Joe Cocker)의 명곡이다. 74년도에 발매된 이후로 많은 세계인에게 꾸준히 사랑 받아온 곡을, 선우정아식으로 재해석한 버전이다. 조 코커처럼 거슬거슬한 매력은 없지만, 이와는 다른 굉장한 매력을 낸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는 시구가 생각나는 보컬이다. 2
마지막 곡은 선우정아 씨의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자, 감히 가장 명곡이라고 말하고 싶은 곡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선우정아의 노래를 추천해달라 한다면 주저없이 이 노래를 추천할 것이다. 선우정아라는 '보컬리스트'로서 굉장히 돋보이는 보컬을 선보이며, '작사가'로서 얼마나 시적으로 아름다운 가사를 쓰는지도 알 수 있고 '작곡가/프로듀서'로서의 브라스와 드럼을 어떻게 쓰는지도 살짝 엿볼 수 있다. (특히 보컬이 가장 압도적이다) 앨범 버전도 좋고, 온스테이지 라이브 버전도 좋다. 양쪽 모두 그녀의 풍부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비 온다!'라고 소리지르는 후렴 부분은 나의 마음에 장대비를 시원하게 내려주며 묵은 때를 씻겨준다. 그녀는 피리 부는 사람이 되고 나는 한 마리의 쥐가 되어 피리 소리의 뒤를 좇는다. 그녀의 가사처럼 아이가 되어 그녀의 음악이라는 빗속을 자유롭게 뛰어논다. 정말이지, 우아하게 노래를 부른다.
알 수 없는 작곡가
사실 주구장창 보컬 얘기만 했는데 다른 부분들도 좋다. 보컬이 '압도적으로' 좋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렸다. 다른 세션 분들께 사과의 말씀 올린다...
선우정아 씨는 본인을 '알 수 없는 작곡가'라고 말했다만, 예전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다. 적어도 아이튠즈에서 알 수 없는 작곡가라고 뜨지 않고 당당하게 SunWoo Jung-A라고 뜰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아직 대중들은 그녀를 많이 모르는 것 같아 아쉽다. 나는 그녀가 음악이 인생의 전부라는 말이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날이 왓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이다.
선우정아 씨의 라이브를 직접 보고싶다. 그럴 기회가 있기나 할까. 그녀가 변박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싶다.
Coming Up Next....
I'm the crawling king snake and I rule my den.
(원글 2015년 10월 11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