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나는 가수다'에 한영애 씨가 출연한다는 소식에 크게 반가워했었다. 한영애 씨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가수기는 했으나 대중들에게 괴짜 정도로 인식이 되는 가수였기에 이런 프로에 출연을 하는 '대중적인' 행보가 굉장히 반가웠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접하기를 바랐었다.
나는 한영애 씨를 두고 한국에서 노래를 하는 사람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니크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뒤이어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대중들의 인식처럼 '괴짜'와 같은 면모보다는 그 특유의 매력적인 허스키 목소리와 그녀가 쓴 가사가 그리는 세상들이 정말로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주고만 싶다.
소리의 마녀
한영애 씨와 관련된 별명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건 아마 '소리의 마녀'라는 별명이 아닐까 싶다. '마녀'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으로 들릴만한 어둡고 음침한 이미지가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긍정적인 이미지들도 존재한다. 부정적인 것보다는 이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붙인 별명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면 마치 소리에 마법을 부려 노래를 듣는 사람 모두 마법에 걸리게 만든다.
이처럼 듣는 이들을 하나 둘 마법에 걸리게 만드는 한영애 씨 노래의 첫 번째 비법은 목소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묘사 능력이 부족하여 이 마법 같은 목소리를 비유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한(恨)이 서려있는 목소리라고 말해보겠다. 이 목소리는 신비롭고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알 수 없는 연민감을 자아낸다. 과거에 '신촌블루스'에서 블루지하고 소울이 충만한 보컬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블루스가 과거 미국 흑인 노예들의 음악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연관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개인이 가진 아픔과 한(恨)을 목소리로 표현해내는 능력이 그녀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며칠간 울어서 목소리가 완전히 나갔을 때의 음색 같기도 하고, 술을 잔뜩 마신 사람이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토해내는 소리 같기도 해서 사람들이 쉽게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에 이입할 수가 있게 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에 더욱 집중하며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한 가수로서 자신의 목소리가 해야될 일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대로 따른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은 가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러는 것 같다.) 곡을 해석하는 능력이라 해야할까, 어떤 상황에 어떤 느낌으로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노래를 불러야할지 파악하는 것이 탁월한 사람들이 있다. 한영애 씨도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다. 연극영화과 출신이라 그런지 어떤 상황에서는 연극 배우가 된 것처럼 극적으로 터지는 목소리를 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비중이 적은 엑스트라가 된 것처럼 악기 소리에 용해되어 악기와 하나가 되는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를 악기로 생각하고 연주를 하는 느낌이다. 비록 이 앨범에서는 전반적으로 악기와 하나 되는 노래가 많은데, 전작 '바라본다'나 신촌블루스 시절 노래를 몇 개 들어보면 이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노래는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연극 배우가 얼마나 그 배역을 잘 표현해내느냐에 따라 관객들의 몰입도가 달라지듯, 노래도 일종의 '표현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한영애 씨는 역시나 훌륭하게 잘 표현해내는 가수이다. 단지 그녀의 목소리와 발성에만 달린 문제는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주위 악기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또 그녀가 부르는 가사는 어떤지, 가사와 음악은 얼마나 관련 있어보이는지, 라이브 공연이라면 그녀의 몸짓이나 표정은 어떠한지 등과도 관련이 되어있을 것이다. 한영애 씨의 음악을 들어보면 머리 속에서 한 폭의 그림이 상상이 간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마치 윌리엄 터너의 그림처럼 따스한 인상을 주는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놀라운 표현력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작곡이나 곡의 편곡 같은 부분도 그 '마법'에 일조한다. 하지만 그녀가 작곡한 곡이 많지 않고 대부분 작사만 하거나 작곡 / 편곡에 참여한 수준이라 여기서는 다루지 않도록 한다.
한영애 1992
그렇다면 이 앨범은 과연 어떤 앨범인가. 앞서 그녀의 2집, '바라본다'가 보통 말하는 그녀의 No. 1 앨범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3집 '한영애 1992' 또한 2집에 못지 않는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말도 안돼]는 아주 실험적인 곡이다. 앨범의 첫머리부터 이런 곡을 배치할 생각을 하다니, 아주 대담하거나 이 노래에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것이겠다. 이 노래는 한영애 씨가 처음으로 작사 작곡 모두 한 노래라고 하니, 그만큼 이 노래에 자신이 있는 것이라 생각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녀가 가진 생각이 아주 잘 표현된 곡이라 생각한다. '희망은 언제나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있기 마련이지'와 같이 가사에서 일부 옅볼 수가 있다. 마치 누군가를 꾸짖듯이 부르는 가사와 '말도 안돼'라고 한영애 씨가 말하면 코러스가 '말은 되지'라며 받아치듯 부르는 부분들이 특이하다. 중간 중간에 들리는 갑작스런 효과음(유리잔에 담긴 얼음 덩어리가 짤랑이는 것 같은 소리라든지 갑자기 등장하는 피아노 코드 소리라든지)들도 상당히 조화롭게 녹아들어 있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노래이다.
[부서진 밤]은 우울한 블루스 곡이다. 외롭고 상처받은 마음을 노래한 듯한 가사와 하모니카의 소리가 잘 어울린다. 하몬드 오르간이 은은하게 뒤에서 깔리는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 어쩌면 한영애 씨 전체 커리어에서 가장 유명할지도 모르는 곡 [조율]이 등장한다. 젊은 세대들은 JK 김동욱 씨의 커버 버전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기승전결이 잘 짜여진 곡 중 하나로,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줘서 극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노래 멜로디가 참으로 좋다. 아마 도입부만 들으면 '아, 이 노래?' 할만 한 곡이기에 설명은 짧게 줄이겠다.
다음으로는 조금 특이한 곡인 [멋진 그대여]가 등장한다. 귀여운 오르골 소리로 시작하는 이 곡은 완전히 마무리하기 전에 갑자기 한영애 씨의 보컬 부분으로 넘어간다. 정신이 나간 듯, 술에 취한 듯 부르는데 덕분에 음산한 분위기가 배가 된다. 이어서 다시 오르골 소리가 이상한 소리들과 같이 등장하며 곡이 이어지는데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리고 다시 갑자기 한영애 씨의 목소리가 나오는데 이제는 음산하다 못해 기묘하게 느껴진다. 곡 구성도 특이하고 분위기도 특이한 곡이다. (쓰고 보니까 조금 특이한 곡이 아니라 많이 특이한 곡이다.)
[이별못한 이별]부터 [이어도]까지는 한영애 씨가 한 때 활동했던 그룹 '해바라기'의 이정선 / 이주호 씨가 만들어준 노래들이다. 이 곡에서는 이전까지 있던 실험적인 분위기가 잠시 수그러들고 전형적인 락 발라드 느낌을 보여준다. 악기 소리가 줄어들고 한영애 씨의 목소리가 앞으로 두드러지는데, 그녀가 '괴물 보컬'임을 알 수 있는 곡 중 하나이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이 이어진다. 이번에는 [이별못한 이별]보다 조금 더 조용한 발라드 곡인데 역시 한영애 씨의 멋있는 보컬이 인상적이다.
[이어도]는 이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곡으로, 한국 대중 음악에서 거의 최초로 국악적인 요소와 서양 음악적인 요소를 섞은 곡이다. 박(拍)이라고 해서 문묘제례악이나 종묘제례악과 같은 국악 곡을 연주하기 전에 한 번 울려 곡이 시작함을 알리는 전통 악기가 있는데, 이것을 도입함으로 특이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국악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나타나는 곡이다. (가령 대금 소리처럼 들리는 플루트의 소리라든지) 애상적인 분위기와 간간히 울리는 박의 소리, 판소리를 하는 것 같은 한영애의 보컬과 코러스 및 후렴 부분 등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들이 넘쳐나는 곡이다. 직접 들어보기를 바란다. 1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도 안돼 (희망은 사람의 몫) (remake)]가 나온다. 첫 번째 곡과는 다른 구성과 분위기로 (remix)가 아닌 (remake)인 이유를 잘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희망은 사람의 몫)이라는 노래 가사를 곡의 제목에 붙여 이 구절을 한영애 본인이 중요하게 느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짧은 마무리
'한영애'라고 하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를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노래 [조율]의 원래 가수 정도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기는 했어도 반 년 정도만 출연했고 5년 정도 지난 일이라 기억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얼마 전에 광화문 광장 촛불 집회에서 [조율]을 비롯해 몇 곡을 불렀었는데 이 때 봤던 사람들도 꽤 있으려나..?) 그렇기에 2집 '바라본다' 대신 이 앨범 '한영애 1992'의 리뷰를 하는 것이다. 3집이 2집 못지 않는 명반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익숙한 것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조금 더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Coming Up Next....
So, what would you little maniacs like to do first?
- 보통 서태지의 '하여가'가 처음이라고 생각할텐데 서태지의 하여가는 1993년 작이고 이 앨범은 1992년 3월 작이다. 비록 인기나 영향력은 하여가 쪽이 압도적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