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도 MBC 카우치 사건이 터지고 나는 솔직히 한국 인디음악계는 최소 10년은 망해있을 줄 알았다. 2005년은 크라잉넛의 '말달리자' 앨범이 메가히트를 치고 인디음악 1세대 밴드들이 서서히 조명받기 시작하면서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그러던 때였다. 막 인디 씬의 물이 오를 때 팍 터져버려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힌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이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무기한으로 보이던 침체기에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인디 밴드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열심히 바꿔준 밴드가 있었으니, 바로 장기하와 얼굴들이다.
2세대 인디음악의 선두주자
장기하와 얼굴들의 첫 싱글 [싸구려 커피]의 등장은 크라잉넛의 [말달리자]의 등장을 연상시켰다. 텔리비전 채널을 돌릴 때마다,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때마다 모두들 [싸구려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노래방에 가서도 이 노래를 부르려는 경쟁이 있었다. 모던 락적인 깔끔하고 정돈된 사운드에 올라간 읊조리듯 하는 랩(?)처럼 들리는 보컬 라인이 특이해 사람들의 관심을 잘 끌 수 있었고, 특히나 가사가 자취생들의 찌질한 현실을 놀랍도록 잘 묘사했던 터라 많은 사람들(특히 젊은 세대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1집에서 보여준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은 갑자기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음악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음악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의 음악은 2000년대 당시의 음악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오히려 2~30년 전의 음악, 산울림(김창완 씨)이나 송창식 씨의 그것에 더 가까웠다. 목놓아 부르기보단 털털하게 내뱉으며 부르는 듯한 보컬, 외래어가 아닌 한국어만을 사용하며 한국적인 내용들을 담은 가사, 일반적으로 쓰이는 소재가 아닌 특이한 곳에서 따오는 노래의 소재와 같은 것들이 그들의 음악들과 제법 많이 닮아있었다. 음악색은 기타와 목소리가 강조되고 가사가 중시되는 느낌이나 스타일 등이 포크에서 많이 영향 1을 받은 것 같았다. 덕분에 젊은 층의 공감과 중년 층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남녀노소 좋아하는 밴드가 될 수 있었다. 2
이후 같은 앨범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도 이어서 히트시키며 장기하와 얼굴들은 인지도를 크게 키워 텔레비전과 같은 곳에 자주 나오게 되었고, 이들이 대중 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단정해보이고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이 인디 밴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의 개선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현재는 2세대 인디 밴드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밴드가 되었다고 말해도 이 말에 쉽게 부정할만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들이 보여줬던 성공은 진짜였다.
[나와]!라고 우리들에게 외치며 앨범은 문을 연다.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앞으로 나오라고 말하는 노래인데, 실제로 라이브 공연에서 첫 곡으로 많이 사용했었다. 1집 당시에는 미미 시스터즈가 활동하던 때여서 미미 시스터즈의 코러스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아까 장기하 씨가 쓰는 소재가 특이하다는 말을 했었는데, 다음 곡 [아무것도 없잖어]이 바로 그런 노래이다. 출애굽기의 내용을 모티프로 삼은 곡으로, 선지자의 말만 듣고 '죽을똥 살똥' 왔으나 푸석한 모래와 자갈돌만 있었다, 완전히 속아버렸다라는 내용의 노래이다. 뜨거운 사막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기타 소리와 느긋느긋한 코러스가 인상적이며, 간간히 나오는 효과음들(선지자의 목소리나 성가대의 노래 소리 같은 코러스 등)이 재밌는 곡이다. 3
[오늘도 무사히]는 서부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배경음 소리에 특이한 멜로디의 보컬 라인이 특징인 곡이다. 후렴구를 들으면 '이런 멜로디로도 후렴을 짤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엔 분위기가 많이 차분해져 조용한 노래인 [정말로 없었는지]가 나온다. 전반부는 특히 기타만 나와서 간단하고 조용한 느낌을 준다. 가끔 나와서 강조 효과만 주는 코러스들과 중간중간에 나오는 휘파람 소리가 깊은 여운을 준다. 한밤 중에 우울해지고 외로움 탈 때 들으면 아주 좋은 곡이다.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은 러브(Love)의 [A House Is Not A Motel]을 떠올린다. 삼거리에서 만난 한 아름다운 여성과 같이 걸었지만 알고보니 꿈이었다는 내용의 슬픈가사이다.
이어지는 곡은 둠두둠 - (따라라) 하는 주고 받는 부분이 재밌는 [말하러 가는 길]이다. '그'한테 오랜 시간 동안 준비를 해서 말해야하는 어떤 내용을 말하러 가는 길에서의 느낌을 담은 곡이다. 사랑 고백이 될 수도 있고 죄 지은 것에 대한 자백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보컬이 참 특이한 곡인 [나를 받아주오]이다. 앞 부분은 특이하게 목소리를 꺾으며 이리저리 왔다가는 목소리를 보여주다가 후렴에서는 시원하게 부른다. 아마 이 앨범에서 장기하 씨의 보컬 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목소리를 오고가며, 살짝살짝 꺾으며 부르는 멜로디에 박자를 가지고 놀며 부르니 말이다. 재밌는 곡이다.
미미 시스터즈는 이 앨범에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곡 [그 남자 왜]에서는 크게 나온다. 쫀득쫀득한 베이스와 이에 맞춘 기타 소리가 좋다.
[멱살 한번 잡히십시다]는 과격한 제목처럼 이 앨범에서 가장 과격한 기타 소리를 들려주는 노래이다. 멱살 한 번 '잡힙시다'도 아니고 '잡히십시다'라고 쓴 데에서 그의 예의바름을 느낄 수가 있다. 가사와 멜로디가 정말 특이하다.
[싸구려 커피]는 굳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많이들 알고 있는 곡일 것이다. 사실상 장기하와 얼굴들의 첫 번째 히트이자 그들의 인지도를 띄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곡이다. 골방 같은데에 갇혀 힘겹게 살아가는 자취생들의 삶을 꽤나 예리한 단어들로 표현해내는 곡이다. (항상 들을 때마다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슬프다.) 가장 백미는 역시나 중간 부분의 랩(?)이리라. 마치 말하는 것처럼 말할 때 억양과 말투를 거의 그대로 쓰면서 부르는데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멜로디와 숨이 멎도록 잘 어울려서 놀랍기만 하다. 박자를 가지고 엄청나게 장난을 친 부분이라(아마 엄청나게 연습을 했으리라.) 느껴지는 그루브가 다분히 강력하다.
[싸구려 커피]와 함께 장기하와 얼굴들의 첫 번째 히트곡이자 1집의 타이틀 곡인 [달이 차오른다, 가자]이다. 고등학생 모의고사 과학탐구 영역에 문제로 가사를 낼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특히 라이브에서 미미 시스터즈가 보여주는 기묘한 춤이 노래에 해학성을 더한다. [싸구려 커피]처럼 미묘한 리듬감을 이용해 쫀득쫀득하게 부른 것이 아주 놀라울 지경이다.
잠깐 다시 쉬어가는데, 제목처럼 느리게 걷고만 싶어지는 [느리게 걷자]이다. 스카 리듬과 봉고 비스무리하게 들리는 드럼 소리 덕에 느린 분위기의 곡이지만 천천히 몸을 맡길 수 있다. 하와이 해변에 누워서 노래를 듣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는 지금까지의 곡들보다 조금 다른 분위기의 곡인 [별일 없이 산다]이다. 마치 2집과 3집에서 보여줄 장기하 씨의 '락 스피릿'을 보여주는 곡이다. 키보드 소리가 60년대 말 유행했던 사이키델릭 락을 상징하는 듯하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고 자랑하는 내용의 가사와 재밌는 스타일의 보컬이 마음에 드는 곡이다.
짧은 마무리
장기하와 얼굴들의 1집은 한국 대중음악 사에 큰 발자국으로 남게 되었다. 말하는 듯이 툭, 툭 던지며 부르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그루브 넘치는 리듬감과 말의 미묘한 강세를 이용한 멜로디 라인, 재밌고 특이한 소재를 바탕으로 쓰는 가사 등 여러모로 신선한 임팩트를 던졌었다. 나에게도 꽤나 큰 충격이었는데, 각 곡 하나하나 들을 때마다 세세한 부분들에 놀라 감탄이 나왔었던 기억이 난다. 해학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꽤나 탄탄하게 잘 짜여진 곡들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기하와 얼굴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우리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2집 '장기하와 얼굴들', 3집 '사람의 마음', 4집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를 이어 발표하며 1집과는 다른 의미로 놀랄만한 행보를 보여주는데, 이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리뷰하도록 하겠다.
Coming Up Next....
Oh ha ha... ah ha ha... ah ha ha.... TTTAAAAMMMEEE!!!! TTTAAAAMMMEEE!!!